2009.06.21 15:15

홍상수 '잘 알지도 못하면서'_재밌는 장면이 많은 영화

오랜만에 홍상수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  언젠가부터 홍상수 영화를 편히 보게 됐다.  전 같으면 골치 아픈 영화 축에 속했을텐데, 요즘엔 오히려 홍상수 영화가 개중 편안한 영화가 되었다.  급거 주류로 떠오른 봉준호, 박찬욱에 비해서는 확실히 덜 골치가 아프다.  아마도 '생활의 발견'(2002)을 보면서는 마치 내가 등장인물이고, 관객에게 속이 다 들여다보인 것 처럼, 민망하고 불편했던 그 기분을 이제 얼마간 포기하고, 그 모든 상황과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입장에서 비웃으며 보아넘기게 되어 그렇게 된 것 같다.

한 마디로 재밌었다.  홍상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생떼쓰는' 어른같지 않은 어른들을 보는 게 재밌었다.  처음 본 사람, 그것도 업무로 만난 사람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하지 말라며 화를 내거나(영화제 관계자인 엄지원이 영화감독 김태우가 자원봉사자들에게 술 사겠다고 빈말 하는 걸 보고), 8년만에 만난 후배가 바람둥이라고 했다고 금방 정색하고 언짢은 내색을 한다거나(김태우가 자신을 바람둥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공형진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의 부인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고 지인들을 동원해 낫을 들고 그 외도남을 죽일 듯 협박하는 것(하정우가 고현정, 김태우의 정사 현장을 습격, 김태우를 협박하는 장면) 등 있을 법 하지만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이 영화에서는 여러번 나온다.

어쩌면,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 즉 내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보는 게 더 재밌었던 것 같다. 다른 많은 영화에서 그렇듯이.. 대리만족..


엄지원이 만난지 10분도 안된 김태우에게 "자봉애들한테 정말 술 사실거에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왜해요? 쟤들 은 믿고 기다린다구요!" 했을 때나, 전날밤 술을 마시다가 먼저 가버린 김태우에게 "당신 때문에 나 강간당했다구요.  어떻게 술취한 여자를 남자방에 두고 갈 수가 있어요!  난 너무 취했었어요.  어쨋든 다 당신 때문이야"라고 강간한 남자보다 김태우를 더 원망하며 생떼를 쓰는 엄지원이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았다(저 싸이코~ 근데 저런애 있어, 맞아!).

아무튼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이런 식이다.  술 마시고 토하고 취하고 주정하고 다음날 머리 아프고 속 아픈 너절한 일상 속에서 나오는 너절한 대화들.. 로 채워져 있다.  사건은 있으되, 국면 전환은 없고, 원래 그랬던 인간들은 또 그 모습으로 살아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순제작비는 2억원이었다고 한다.  고현정, 김태우, 공형진, 하정우, 엄지원 등 몸값 비싼 주, 조연배우들 모두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저예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 의도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촬영기법도 '우리 저예산이니까 미안하지만 보는 너네가 이해해라'는 식이다.  카메라 한 대만 쓴 것 같은 장면이 많고, 줌인, 줌아웃은 캠코더 처음 잡아본 사람이 조작을 잘 못해 확 끌어당겼다 확 풀고 하듯이, 마구 찍어 어지러울 정도다.

영화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애시당초 없어, 뭘 어쩌라는 건 없다. 장면 장면이 주는 단상이 오래 기억되고,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끼리는 마치 진짜 있었던 일 처럼 '마저마저 그거그거'하면서 배를 잡고 웃으며 할 얘기가 많은 영화,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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