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07 23:11

LP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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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동 LP 상가에 가게 됐었다.  LP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는 남편이 일전에 혼자 다녀온 후 꼭 다시 가고 싶다고 벼르던 말을 건성으로 들었었고, 회현동까지 온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남편의 의지를 어떻게 하면 꺾을까 잠시 고민했었지만, 혼자 백화점에 버려져 마음껏 지를 수도 없는 상품들을 보기만 할 자신도 없고 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하상가로 따라 들어갔다.

한번 맘 먹고 2007년의 LP 가게를 상상해 본다면 금방 그림이 나올 법도 한데, 이미 CD도 미디어로서의 가치를 의심받고 있는 처지인 시점의 LP 가게는 2007년의 어느 도시에서건 한심해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아날로그의 의도된 비효율'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아티스트별 분류는 고사하고 알파벳으로도 분류되어 있지 않은, 그 좁디 좁은 LP 자켓의 등허리에 깨알같이 적힌 글자의 흔적을 따라, 사람들은 아예 퍼질러 앉아 천장부터 바닥까지 일일히 LP 자켓을 확인하며 뒤진다.  퍼질러 앉기 편하도록 효도의자, 욕실용 의자, 원형의 목재의자 등 다양한 모양의 의자들이 굴러다닌다. 

처음엔, 지난번 남편이 알아 둔 가게로 같이 들어가 팝 위주의 컬렉션을 구경했다. 100장 넘는 판을 뒤졌지만, 눈에 들어온 아티스트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시카고가 전부다.  케니 로긴스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앨범을 골라놨지만, 100장 중 10장을 건질까 말까 한 시츄에이션이 짜증스러워서 클래식 쪽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클래식이 나에게는 '초이스'가 많을 것 같기도 했고, 나에게 LP 가게에선 클래식 음반을 찾아줘야 한다는 일종의 '이미지' 같은 것이 있어서, 어쨋든 애써 클래식 판이 많은 곳으로 찾아갔다(많은 재래식 상가가 그렇듯이 한 사람이 몇개의 가게를 한꺼번에 운영하는 곳이 많아, 클래식과 팝이 공간은 분리돼 있으나 결국은 한꺼번에 계산을 했다).

클래식 쪽으로 옮겨간 뒤부터 나도 신이 났다.  전설적인 연주자들의 몇십년 전 음반이라고 생각하니 흥이 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콘첼토를 집중적으로 찾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고르다가는 너무 많이 사게 되거나 한장도 못 고르게 될 것 같았다.  호로비츠, 폴리니, 루빈스타인, 번스타인, 하이팅크 등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쇼팽, 브람스,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콘첼토를 골랐다.  워낙 좋아하는 곡이니 위험부담이 없었고, 워낙 유명한 연주자들이니 더더욱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클래식 쪽에서 5장을 건졌다.

팝과 클래식을 합쳐 우리 부부는 14장을 구입했다.  클래식 판 중 하나는 두장짜리라고 X2를 했다.  팝은 2천원, 클래식은 3천원씩 총 3만6천원이 들었다.  이상하게 뿌듯했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LP 상가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거기서 그렇게 죽치고 앉아 LP를 고르는 것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나도 그래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  주말 오후에 거기서 그렇게 죽치고 앉아 LP를 고르는 사람들은 필시 음악을 그 중에서도 LP로 듣는 음악을 사랑해마지 않는 사람들일 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와서 판을 고르는 사람들은 요즘 잘 만나기 힘든 '있어보이는 척 하지 않는' 사람들인 듯 싶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LP에 빠져 있는 것 자체를 무슨 낭만으로 생각해 겉멋부리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망상가'면 모를까,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취향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고보니 모든 취미생활이 그렇기는 하다.

집에 와서 판 하나하나를 턴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맘이 설렌다.  남편이 예전에 듣던 음악들을 굳이 LP로 찾아나서서 뭐 하나 찾았다고 그렇게 반가워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을 그렇게 해서 그런지 몰라도, LP 너머에서는 연주자들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다.  템포가 빠른 부분에서는 조금은 숨차하며 활과 손을 놀리고, 호흡이 긴 부분에서는 등을 젓히고 숨을 내쉬는 그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이것을 오늘 밤 처음 느꼈다.

어릴 적 좋은 전축과 스피커를 사놓고 수시로 음악을 틀어놓으셨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 많던 LP들 지금 다 어째셨냐'고 여쭤봤다.  몇년 전 경황없이 거처를 옮기는 와중에 어디로 간지 행방이 묘연하다.  어머니 왈, '어느 순간 짐이라고 느껴졌다'고 하셨다.  맞다.  수집품도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지, 긴박한 삶의 한 페이지에서는 그저 부피 큰 무엇일 뿐이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모았던 LP판은 간 곳을 모르고, 나와 남편은 지하상가를 뒤져 한 장 3천원을 지불하고 되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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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3
  1. TONE WORKS™ 2007.10.07 23: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LP처럼 따스한 음은 다른 매체물이 따라오기 힘들죠...
    좋은글 읽고 갑니다

  2. 낭만시인 2007.10.09 19: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제 블로그에 오신 첫 외부 손님입니다. 환영환영! 미천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3. sweetpee 2007.10.20 13: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디지털 음원은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사람의 가청주파수대에서 잘라내어 0과1이라는 신호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에서 잘라나간 비가청주파수 영역의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지요. 가끔 아나로그 소리를 들을때 유장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소리는 귀로 듣는다 하지만, 가청주파수 대역을 벗어난 소리는 눈과 몸, 감성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아나로그의 매력은 쉬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